국내 배터리 업계가 사상 초유의 위기에 직면했다. 미국 전기차 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되며 불과 보름 만에 17조3000억원 규모의 공급 계약이 취소되거나 축소된 것이다. 테슬라와 포드 등 주요 고객사들이 잇따라 계약을 해지하면서 K배터리 산업 전반에 충격이 확산되고 있다.
31일 업계에 따르면 엘앤에프는 지난해 2월 테슬라에 3조8347억원 규모의 양극재를 공급하기로 했으나 실제 공급액은 937만원에 그쳤다고 밝혔다. 이는 사이버트럭 생산 지연과 저조한 판매 실적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블룸버그는 테슬라의 배터리용 소재 개발 지연으로 엘앤에프가 큰 타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LG에너지솔루션도 잇따른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포드가 전기차 생산 계획을 줄이면서 9조6000억원 규모의 배터리 공급 계약을 해지했고, 이어 미국 배터리팩 제조사 FBPS가 사업을 철수하며 3조9000억원 규모 모듈 공급 계약이 취소됐다. SK온 역시 포드와 공동 설립한 합작 법인을 지난 11일 해체했다. 업계는 이러한 계약 해지가 모두 미국 시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미국 미시간 홀랜드 공장 (사진=LG에너지솔루션)
한때 연 50%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하던 미국 전기차 시장은 지난해부터 급격히 둔화하는 추세다.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집계에 따르면, 올해 1~11월 전기차 판매량은 113만5552대로 전년 대비 2% 증가에 그쳤다. 10월부터는 판매량이 월 7만대 이하로 급감하며 시장이 얼어붙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10월 전기차 세액공제를 폐지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보조금이 사라지면서 실질적인 차량 가격이 상승했고 소비자 부담이 커졌다. 신영증권은 “2025년 미국 전기차 판매가 올해 대비 16%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완성차 업체들은 발 빠르게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혼다는 2027년 출시 예정이던 대형 전기 SUV 개발을 중단하고 전동화 투자액을 10조엔에서 7조엔으로 30% 줄였다. 현대차도 미국 조지아 공장에서 전기차 생산을 줄이고 하이브리드 생산을 확대하기로 했다. 포드는 주력 모델 F-150 라이트닝 생산을 멈추고 내연기관차 중심의 구조로 재편 중이다.
이 같은 완성차 업계의 조정이 배터리 업계로 번지고 있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완성차가 재채기를 하면 배터리 기업은 독감에 걸리고 소재 업체는 폐렴이 온다는 말이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17일 이후 국내 6대 배터리 및 소재 기업이 통보받은 계약 취소 규모는 총 17조3000억원으로 올해 예상 매출액(51조4000억원)의 34%에 달한다.
주가 하락도 이어지고 있다. 엘앤에프는 12월30일 주가가 전일 대비 9.85% 하락한 9만5200원에 거래를 마쳤으며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도 각각 3.03%, 2.88% 떨어졌다.
한편 미국 전기차 시장은 내년 하이브리드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완성차 기업들이 수익성이 높은 중소형·고급 모델에 집중하며 생산 전략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수요가 일시적으로 위축된 것이며 2026년 이후 점진적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