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싱 청쿵 허치슨 홀딩스 전 회장 (사진=블룸버그)
홍콩 최고 자산가로 알려진 리카싱 가문이 보유 중이던 주택 400채를 시세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에 일괄 매각에 나서면서 시장에 충격을 주고 있다. 경기 침체에 허덕이는 홍콩 부동산 시장에서 최대 부호의 자산 매각은 단순한 투자 판단을 넘어 상징적인 경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1일(현지시각) 중국 매일경제신문은 리카싱 가문의 청쿵그룹 산하 허치슨 왐포아 부동산이 보유한 주택 400채를 한꺼번에 시장에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이번 매물은 홍콩과 광둥성을 포함한 4개 지역의 아파트 및 빌라 단지로 구성돼 있으며, 일부 주택은 채당 최저 40만 위안(약 7722만원) 수준으로 책정됐다. 이는 일반적인 계약금 수준에 불과한 ‘헐값’으로, 현지 중개업자들에 따르면 홍콩 내 투자자들의 관심이 급격히 쏠리고 있다.
이 같은 대규모 매각은 리카싱 일가의 오랜 자산관리 방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청쿵그룹은 지난 2015년에도 홍콩 증시가 활황이던 시기에 수백 채의 부동산을 한꺼번에 매각해 한 달 만에 1조원 이상을 현금화한 전력이 있다. 최근 몇 년간에도 본토와 홍콩 부동산 시장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매물을 정리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처분을 둘러싼 의심의 시선도 거세다. 중국 본토에서는 단순한 투자전략을 넘어선 정치적 또는 경제적 판단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특히 CK허치슨이 최근 파나마 운하 운영권 매각을 추진하면서 미중 간 외교 갈등 한복판에 섰고, 이번 부동산 매각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는 추측이 더해진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리카싱이 홍콩달러 가치 하락을 예견하고 자산 회수를 본격화한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미래를 읽는 투자자’로 불리는 그가 지금처럼 시장이 위축된 시기에 대량 처분에 나선 배경에 주목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편, 홍콩 부동산 시장은 이미 수년 전부터 침체 조짐이 뚜렷했다. 고공행진을 이어오던 집값은 코로나19 이후 경기 둔화와 함께 급락세로 돌아섰고, 정부는 주택 시장 활성화를 위해 주거용 및 비주거용 부동산 대출 한도를 확대했다. 민간 은행들도 잇따라 금리 인하에 나섰지만 시장 반응은 냉담하다.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업체 나이트 프랭크의 루시아 렁 이사는 “고급 주택 가격은 일정 부분 방어할 수 있겠지만 부실 자산은 최대 50%까지 하락할 수 있다”며 하향 압력이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부동산은 홍콩 경제의 핵심 기반이자 상징이었지만, 최근 대규모 자산가의 이탈과 가격 급락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시장 신뢰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리카싱 일가의 움직임은 그 변화의 방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